고장난 자건거 | S.O.SUnited

 Ictus's Waits & Weill | UTO CF  |《접속》|『루트와 코드』                          

 



Black Rider

 

 

리뷰 | PHOTO

 

 [강정의 나쁜 취향] 톰 웨이츠의 노래
한국일보 2005-03-28 

3월 22일, 제4회 통영국제음악제의 폐막공연을 보러 갔다.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서 한 시간 이상 앉아 있는 걸 반쯤‘지옥의 경험’으로 간주하는 나로서는 의외의 행차였다고 할 수 있다.

네 시간 이상 차를 타야 하는 것도 마뜩찮았지만, 굳이 몸을 움직였던 건 익투스 앙상블(Ictus Ensemble)이라는 낯선 악단이 톰 웨이츠(Tom Waits)의 노래를 연주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였다. 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깊고 어두운 탄광 같은 곳에서 흙 속의 보물을 긁어내는 것 같은 톰 웨이츠의 노래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연주자에 의해 어떤 식으로 재현될지 무척 궁금했다.

20세기 초, 브레히트 등과 같이 작업했던 쿠르트 바일(Kurt Weil)의 노래도 동시에 연주된다는 얘긴 귓등으로 튕긴 채 도로변의 야자나무 가로수가 인상적인 통영엘 들어섰다. 일본 후쿠오카 지방에서 발생한 강진의 여파가 남해동부 일대에 간헐적인 여진을 몰고 오던 화요일의 흐린 저녁이었다.

‘Memory’란 타이틀로 윤이상 타계 10주기를 추모한 통영음악제는 3월17일부터 일주일간 세계 12개국에서 200여명의 연주자들이 참여해 다양한 현대음악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매일 두차례 공연 중 윤이상의 곡이 한 곡 이상은 반드시 연주되었다. 2004년 12월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수상한 재독 작곡가 진은숙이 단연 화제의 중심에 있었으나, 행사 끝물에 톰 웨이츠란 이름에 이끌려 부랴부랴 내려온 나로선 거기에 대해 별 할 말이 없다.

행사 전체에 대한 리뷰도 가당찮은 입장이다. 익투스 앙상블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행사가 종료된 상황에서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건 다음 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끈질긴 이명처럼 맴돌던 톰 웨이츠의 노래들뿐이다.

톰 웨이츠는 194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출생한 싱어송라이터이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컬트적인 인물로 통하는데, 그런 만큼 그의 음악은 특정한 장르로 분류하기엔 곤혹스러울 정도로 복잡하고 독특한 면모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독창적으로 만드는 건 거칠고도 비극미 넘치는 그의 음성이다.

어린시절 밥 딜런의 가사를 베껴 쓰던 그는 지지자들 사이에선 ‘딜런 보다 더 딜런 같은 가수’라 추앙 받는다. 그건 가사에 담긴 의미보다도 그것을 토해내는 방식이 인간의 비극적 정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시적 울림을 갖는다는 뜻이다.

도시의 애상과 인간의 본능적인 쓸쓸함, 그리고 상처 받은 애욕 등을 구성지게 읊어대는 그의 발성법은 본질적으로 흉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의 오리지널을 어떻게 편곡한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그러면서도 원곡의 질감을 상당 부분 손상시킨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게 나의 편견이었다. 톰 웨이츠는 리메이크가 불가능한 가수인 셈이다.

따라서 익투스 앙상블이 톰 웨이츠의 곡을 재해석하되, 노래를 제외한 연주의 차원에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첫 곡에서부터 보기 좋게 틀려버렸다. 눈을 감고 들으면 톰 웨이츠의 음반을 틀어놓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쩍 마른 젊은 싱어의 음색과 발성법은 톰 웨이츠를 닮아 있었다.

그러다가 정장이라고 하기엔 다소 껄렁껄렁해 보이는 양복과 카우보이 모자, 길쭉한 얼굴에 듬성듬성 기른 구레나룻마저 톰 웨이츠를 흉내내는 듯한 싱어의 모습을 계속 보고 있자니 약간은 유머러스한 느낌이 들면서 서서히 톰 웨이츠와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이 오리지널과 재현 사이의 거리감 자체를 독자적으로 실연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건대 익투스 앙상블의 공연은 전체적으로 잘 연출된 쇼였던 것 같다. 그것이 흥미진진하고 흥겨웠다는 점에서 그 쇼는 매우 괜찮은 쇼였다.

벨기에 브뤼셀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익투스 앙상블은 1994년부터 로자스(Rosas)무용단과 공동작업을 하고 있는 현대음악 앙상블이다.

공연마다 작곡가 위주의 콘서트, 테마 위주의 콘서트, 공연형식 중심의 콘서트 등 다양한 형태의 콘서트를 실험한다고 하는데, 톰 웨이츠와 쿠르트 바일의 곡을 중심으로 편성된 이번 공연은 작곡가 위주의 콘서트에 속하는 셈이다.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볼 기회가 드물겠지만, 톰 웨이츠를 톰 웨이츠와 흡사하게 연주한 만큼 각 공연마다 악기 편성도 다양하게 변주되고 분위기 또한 판이할 것이라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이들은 레코딩 보다는 공연 위주의 퍼포먼스를 지향하는 악극단에 속한다.

톰 웨이츠를 원본에 가깝게 재현했다는 건 연주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연주한 톰 웨이츠의 노래는 히피 소설가 윌리엄 버로우즈가 참여한 뮤지컬 앨범 ‘The Black Rider’에 실린 곡들이 대부분이다.




앨범을 들어보면 윌리엄 버로우즈의 소설 속에 나오는 구절이나 즉흥적으로 끼적인 가사에 요란한 관현악 편곡이 독특하고도 난해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듣기에 따라선 인내력을 실험하는 듯한 불협화음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이사이 들리는 서정적인 발라드들은 톰 웨이츠가 일관하고 있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불현듯 젖어드는 눈시울로 감응하게 만든다.

그 특유한 정서를 표현하기에 익투스 앙상블의 연주는 더도 덜도 없이 정확하고 매끄러웠다. 그러나 그럴수록 톰 웨이츠의 오리지널 음색으로 그 노래들을 듣고 싶은 욕구가 더욱 커졌다.

때문에 전체적으로 흥겨운 공연이었음에도 뒤끝이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톰 웨이츠를 모르는 관객이라도 누구든 부담없이 즐길 수 있을 만한 공연이었지만, 정작 우리나라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The Black Rider’앨범이‘뜰’가망성은 희박해 보인다. 톰 웨이츠의 노래에 톰 웨이츠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이 이상한 아이러니라니.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끈질기게 공명했던 그의 노래는 따라서 감동의 잔향이라기보다는 애석함의 메아리에 더 가깝다.

톰 웨이츠에 비하면 사전정보가 일천했던 쿠르트 바일은 취향상 상대적으로 덜 관심이 가긴 했지만, 브레히트의 뮤지컬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한 그의 노래 또한 국내에선 자주 듣기 힘든 음악에 속한다.

브레히트가 현대연극의 새로운 형태인 서사극 이론을 확립했다면 쿠르트 바일은 한스 아이슬러 등과 함께 기존의 귀족적이고 고답적인 오페라 형식을 일신하며 보다 서민적이고 현실적인 뮤지컬 음악을 창안한 진보적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좌파에 속하는 만큼 윤이상이 생전에 전면 금지됐던 것처럼 10여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에선‘감히’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디스 빈데보겔이라는 여성 싱어가 맑은 소프라노 창법으로 바일의 노래를 불렀는데, 1930년대 미국의 카바레 음악을 연상시키는 리듬과 독특한 곡 전개는 요즘 유행하는 뮤지컬 음악의 한 원형처럼 들렸다. 익투스 앙상블은 이 이단적인 두 작곡가의 노래들을 신나게 연주하며 관객들을 열광케 했다.

통속적이면서도 끈적끈적한 정서가 반세기 간격을 두고 활동한 두 작곡가 사이의 시간 갭을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의례적인 답례가 아닌 자발적인 흥에 겨워 박수를 보내면서도 여전히 내겐 톰 웨이츠가 문젯거리였다. 밥 대신 인스턴트 햇반으로 배를 채운 기분이었다.

익투스 앙상블의 공연 자체를 문제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공연 내내 과열된 솥단지처럼 부글부글 끓는 톰 웨이츠의 목소리가 그리울 뿐이었다. 아집이랄 수도 있지만, 특정한 연주자의 오리지널리티에 육체적으로 감응한 경우, 그것은 단순한 멜로디나 리듬의 문제가 아닌 게 된다.

누구누구와 비슷한 사람이 진정 찾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익투스 앙상블이 설사 톰 웨이츠보다 더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톰 웨이츠를 연주했다 하더라도 톰 웨이츠가 담지하고 있는 내적 고통이나 삶에 대한 통찰을 생짜로 표현하기엔 역부족이다.

그저 한순간 신나게 즐기고 말기엔 톰 웨이츠의 노래들은 삶의 본원적 감성에 들러붙는 질박한 접착력이 너무 강렬하다. 그리고 그 강렬도는 톰 웨이츠만의 철저한 개인성에 기인한다.

이건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 원전의 생명력이 수시로 되살아 나는 고전음악의 패턴과는 구별되는 대중음악의 독특한 측면 중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톰 웨이츠를 듣는 건 특정한 멜로디와 정서를 지닌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사람과 육체적으로 교호하는 성적 엑스터시에 가깝다.

내 딴에는 그걸 ‘일회적인 영원성’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음악 자체를 넘어 아티스트 특유의 캐릭터와 관련된 문제이다. 소위 진정한 싱어송라이터들은 곡의 형식과 가사의 내용,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잠정적인 혼연일체를 보임으로써 스스로의 캐릭터를 생성해나간다. 거기에 매혹될 경우, 그 매혹은 전면적이고 여지가 없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교할 정도로 그것은‘징’하고 절대적인 매혹이다. 그리고 그런 매혹을 던져주는 뮤지션을 나는 감히‘시인’이라 부른다. 기가 막히게 톰 웨이츠를 연주하는 익투스 앙상블은 내게 사랑하는 그녀와 너무도 닮았지만 전혀 다른 여인을 보여줌으로써 마음 속에 해독되지 못할 그리움의 실체를 일러준 셈이다.

기형도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어두워진 바다를 바라보며 온몸이 야릇하게 진동했던 건 후쿠오카에서 밀려온 여진 탓이 아니었으렸다!    
시인 nietz4@naver.com